영화 '집 이야기'에서 주연 강신일이 연기한 열쇠공 진철. 가족이 다 떠난 낡은 집에 혼자 살고 있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영화 ‘집 이야기’에서 주연 강신일이 연기한 열쇠공 진철. 가족이 다 떠난 낡은 집에 혼자 살고 있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이 아버지, 답답하다. 열쇠공인 그는 세상 문 태반이 디지털도어락으로 바뀌고도 구식 열쇠 일만 고집한다. 온 가족이 함께 살 아파트 장만을 일생의 목표로 살았다. 낡은 집에 창문 하나 못 낸 것도 그 창문을 내고 나면 아파트에 못 갈 것만 같단 마음에서다.  

28일 개봉 영화 ‘집 이야기’ 주연
가족 마음 못 여는 열쇠공 아버지
“말 없던 우리네 아버지 떠올랐죠”
30년 연기내공…암투병 후 도전나서

그래서 짠하다. 그리 사는 동안 아내와는 이혼하고 큰딸과도 연락이 끊긴 지 오래. 어두컴컴한 창고 같은 집엔 아버지 혼자 남았다. 어느 날, 막내딸 은서(이유영)가 찾아오며 집엔 온기가 돌기 시작한다.  
배우 강신일(59)이 아버지 진철 역을 맡아 28일 개봉한 새 영화 ‘집 이야기’(감독 박제범) 얘기다. 

새로 이사할 집을 구하지 못해 가족의 옛 집에 머물게 된 막내딸 은서. 배우 이유영이 연기했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새로 이사할 집을 구하지 못해 가족의 옛 집에 머물게 된 막내딸 은서. 배우 이유영이 연기했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무거운 소재 같지만, 생각보다 닮은 데가 많은 서른 살 신문사 편집기자 막내딸과 아버지의 가식 없는 일상사가 소소한 웃음을 자아낸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모녀의 정을 진득하게 그렸다면, 이 영화는 아버지와 딸의 얘기를 공감이 가게 펼쳐냈다. 92분짜리 담백한 이야기의 울림이 크다. 지난달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돼 호응을 얻었다.  

“깜짝 놀랐어요. 시나리오가 참 따뜻하다 생각했지, 웃을 데가 있나 싶었거든요. 근데 부산 첫 상영 때 예상보다 다양한 곳에서 반응을 보여주시더라고요.”

26일 서울 창성동 카페에서 만난 강신일의 말이다.
 

저도 딸 셋 아빠, 진철 먹먹했죠

이번 영화의 진철은 평생 못 여는 문이 없었지만 정작 가족의 닫힌 마음은 열지 못한 아버지다.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돌 같은 사람. 담대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이번이 장편 데뷔작인 박제범 감독이 처음부터 강신일을 염두에 두며 떠올린 이미지였다.  
“그 아버지, 진철 때문에 한 겁니다, 저는.” 강신일이 말했다.  

“저보단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어요. 흑백사진 느낌의 어린 시절, 할머니와 다 같이 살던 풍경이요. 우리 시대 아버지들은 가족과 대화가 별로 없죠. 말없이 이해하고 그렇게 지내왔던 것 같아요.”

26일 서울 창성동 카페에서 만난 강신일은 "용산에 시사회 하러 가보니 엄청나게 개발됐더라"면서 "발전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론 우리가 땀 흘리고 공들이고 살았던 허름한 공간들을 너무 쉽게 허무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고 말했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26일 서울 창성동 카페에서 만난 강신일은 “용산에 시사회 하러 가보니 엄청나게 개발됐더라”면서 “발전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론 우리가 땀 흘리고 공들이고 살았던 허름한 공간들을 너무 쉽게 허무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고 말했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요즘은 시대가 달라졌다며 말을 이었다. “저도 딸이 셋 있다 보니 대화의 중요성을 느껴요. 우리 집은 아직 다 같이 사는데 다섯 식구 모이면 시끌시끌합니다(웃음). 주로 엄마와 딸들이 말하고요. 좀 더 활기차고 유머 있는 남편, 아버지가 못돼서 미안하고, 소통하려고 노력을 많이 해요. 하지만, 진철처럼 그렇지 못한 환경에 있는 아버지들도 많겠다고 생각합니다.”
 

집과 함께 늙어가는 아버지의 등

집과 연결된 진철의 작업실에서 은서와 진철. 집만큼이나 낡고 오래된 물건이 가득하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집과 연결된 진철의 작업실에서 은서와 진철. 집만큼이나 낡고 오래된 물건이 가득하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진철의 집엔 지나온 세월이 고스란히 담겼다. 보리차가 끓는 난로와 필름 사진, 구식 컴퓨터, 빛바랜 종이 달력…. 빛도 들지 않는 방에서 진철은 밤낮 열쇠 수리 전화를 기다리며 휴대폰을 쥐고 꾸벅꾸벅 존다. 극 중 배경은 인천이지만 실제론 서울 이문동 재개발단지에서 찾은 텅 빈 집에 낡은 벽지와 가구를 배치해 촬영했다.  
 

낡은 집이 진철 그 자체처럼 느껴졌다.

“동네가 재개발단지여서 골목골목 쓰레기더미가 쌓이고 대부분 빈집이었다. 곧 사라질 위기의 그런 집에 살고, 직업도 열쇠공이란 게 사라져가는 한 세대를 표현한 것 같아 씁쓸하고 가슴 저몄다.”
 

혼자 지내던 동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진철이 어두운 방 안에 우두커니 돌아앉은 등이 먹먹했다. 어떤 마음으로 연기했나.

“가족이 하나둘 곁을 떠나 혼자 이 집을 지키며 살아가는 진철에겐 동네 시장 아주머니나, 수건 가게 할머니, 살갑진 않더라도 오래 같이 지내면서 쌓인 정 같은 게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생을 마감할 나이지만, 그런 인생 무상함도 있고, 스스로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다고 봤다.”
 

“쓰레빠 니 거 신어, 무좀 옮아”

시간이 먼지처럼 쌓이던 집에 생기를 불어넣는 건 딸 은서다. 진철은 새집을 구할 때까지 잠시 머물겠다는 딸의 이삿짐을 알뜰살뜰 옮기고, 새 수건을 산다.  

세월이 흘렀지만 진철의 집엔 가족의 흔적이 담긴 사진, 물건이 그대로 있다. 은서는 새삼 추억에 잠긴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세월이 흘렀지만 진철의 집엔 가족의 흔적이 담긴 사진, 물건이 그대로 있다. 은서는 새삼 추억에 잠긴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쓰레빠 니 거 신어, 무좀 옮아”라거나, “너는 젊은 애가 주말에 약속도 없냐?” 핀잔에 “어, 없어” 하는 딸을 데리고 단골 고깃집을 찾는 그의 무뚝뚝한 얼굴 뒤에 은근한 신바람이 묻어난다. 자장면을 비벼주려던 그가 제 그릇을 과격하게 흔들어 뚝딱 비벼 먹는 딸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진 장면도 재밌다.  
 
배우들도 실제 부녀처럼 호흡했다. 은서 역의 이유영은 개봉 전 간담회에서 “제가 아버지가 안 계셔서 촬영하는 동안 진짜 아버지 같이 느껴졌다”면서 “병으로 돌아가신 아버지께 살아생전 잘 못 해 드린 죄책감이 있다. 이 영화를 통해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강신일 역시 “이유영은 제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각도와 시선에서 연기해 놀라웠다. 저도 새로운 에너지를 생성시킬 수 있었다”고 했다.  

은서가, 홀로 바다를 바라보던 아버지 곁에 가만히 다가오는 이 장면은 은서 역의 배우 이유영이 실제 돌아가신 아버지와 생전에 있었던 기억을 영화에 옮긴 것이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은서가, 홀로 바다를 바라보던 아버지 곁에 가만히 다가오는 이 장면은 은서 역의 배우 이유영이 실제 돌아가신 아버지와 생전에 있었던 기억을 영화에 옮긴 것이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모두가 유랑하듯 살아가는 서울에서, 은서가 살 집을 찾아 떠도는 모습을 보고 그는 “그 나잇대에 연극을 하며 이리저리 집을 옮겨 다닌 생각도 났다”고 했다. “정말 옥탑방에다, 반지하, 지금 뭐라 설명할 수도 없어요. 집이란 개념보단 자는 공간이었으니까요.”
 

우리 서로 외롭지 않으려면

영화 말미, 은서는 아버지의 방에 걸려있던 철 지난 달력을 떼어낸다. 빛 바란 주위 벽과 달리 뽀얀 그 달력 자국이 마치 동굴 같던 방에 새로 낸 창문 같다.  

아버지 진철의 방에 서있는 은서. 창문 하나 없는 진철의 방에 걸린 해묵은 달력 사진엔 진철이 가족과 함께 이루고 싶었던 꿈이 담겨있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아버지 진철의 방에 서있는 은서. 창문 하나 없는 진철의 방에 걸린 해묵은 달력 사진엔 진철이 가족과 함께 이루고 싶었던 꿈이 담겨있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이 영화를 어떻게 봐주길 바라느냐는 질문에 강신일은 가만히 말을 이었다.  

“진부하지만, 젊은 사람들이 앞선 세대에 대해 한번 차분하게 생각해보면 좋겠다, 그런 바람이죠. 저도 어쩔 수 없이 나이 들어가고 시대에 뒤처져있는 사람인데 우리 딸들, 젊은 세대에 공감하고 이해하려고 많이 애써도 그 빠르게 변해가는 속도에 보조를 잘 못 맞추겠더라고요. 또 앞선 세대는 이제 막 성장하는 뒷 세대를, 자신들이 겪어왔던 것에 비춰서만 보지 않고 새로운 생각을 이해하려고 해야 하고요.”

 

시대 위로한 연극 ‘칠수와 만수’

대학로‧충무로를 넘나들며 출연작만 110여 편. 최근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고종의 강직한 측근, ‘닥터 프리즈너’에선 교도소 내 재판관으로 통하는 범죄조직 보스, 이달 개봉한 영화 ‘블랙머니’에선 청렴한 수사관 등 묵직한 조역으로 주목받은 그다.  

1986년 강신일을 대학로의 스타로 만든 극단 연우무대 연극 '칠수와 만수'. 18층 높이 빌딩에 매달린 페인트공 청년들의 이야기로, 왼쪽이 당시 칠수 역 문성근, 그 옆이 만수 역의 강신일이다. [중앙포토]

1986년 강신일을 대학로의 스타로 만든 극단 연우무대 연극 ‘칠수와 만수’. 18층 높이 빌딩에 매달린 페인트공 청년들의 이야기로, 왼쪽이 당시 칠수 역 문성근, 그 옆이 만수 역의 강신일이다. [중앙포토]

전공은 의외로 전자공학과(경희대)다. “전자산업을 육성하던 1970년대 어머니 권유에 못 이겨” 진학했고 결국 4년 내내 연극만 했단다. 취업도 고민했지만,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 하고 나 때문에 피해 보는 사람이 생기는 경쟁 사회에선 버틸 자신이 없었”다. 연극은 “다른 사람에게 위안을 줄 수 있음”을 깨닫고 군 제대하자마자 찾아간 곳이 극단 연우무대였다. “번역극이 많던 시대에 거의 유일하게 현시대, 우리들의 고민을 담은 창작극을 하는 단체”여서다. 
1986년 그를 대학로 스타로 만든 연극 ‘칠수와 만수’도 그렇게 탄생했다. 문성근이 칠수, 그가 만수 역을 맡아 서울에서만 5만명 관객을 동원했다.  
 

간암 투병 후 정반대 역할 도전

‘공공의 적’ ‘실미도’ 등 강우석 사단 영화로 충무로에 자리 잡고선 “배신하지 않을 것 같고 친근하고 강직한” 형사, 아버지, 직장상사 캐릭터를 도맡았다.  

영화 '검은 집'에서 사건의 열쇠를 쥔 남자 박충배 역을 맡은 강신일. 이 영화로 대종상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영화 ‘검은 집’에서 사건의 열쇠를 쥔 남자 박충배 역을 맡은 강신일. 이 영화로 대종상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언젠가부터 반복하면 재미없겠다, 싶은 캐릭터가 제안 오면 그 작품의 다른 역할을 역제안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런 대표적인 영화가 ‘검은 집’이다. 목맨 채 죽은 일곱 살 아들의 자살 보험금을 요구하는 기괴한 아버지 역할. “원래는 (주인공인 보험사 직원) 황정민을 많이 돕고 격려하는 직장상사였는데, 반대 캐릭터를 감독한테 제안했죠.”
2007년 간암 투병 후 첫 복귀작이 바로 이 영화였다. 투병하며 “이게 끝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남겨질 가족에 대한 미안함‧죄책감과 함께 배우로서 아직 뭔가 다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고 했다. “한 6~7개월 시골에서 요양하는 동안 조금 마음이 앞섰던 것 같아요. 마음을 내려놔야 한다는 생각이 한편에 있으면서도 빨리 회복돼서 현장으로 돌아가고픈 욕구가 늘 있었죠.”
 

이모티콘 ‘라이언’ 닮은꼴로 유명

라이언. [중앙포토]

라이언. [중앙포토]

회복 후엔 왕성하게 활동하다 보니 젊은 팬들 사이에서 뜻밖의 별명도 생겼다. SNS 곰 인형 모양 이모티콘 ‘라이언’과 닮았다고 ‘라이언 아저씨’다. “몇 년 전 스태프가 캡처해서 보여줘서 알았어요. 닮았다고 크기‧종류도 다양한 인형 선물도 많이 받았고요. 가장 최근엔 잠자고 있는 라이언을 받았죠. 저는 뭐가 닮았는지 잘 모르겠어요(웃음).”
 
나이를 먹을수록 “더 정제된 책임감으로 연기하게 된다”고 했다. “이번 ‘집 이야기’는 힘을 빼고 연기할 수 있어서 기분 좋았어요. 이미 시나리오와 작업환경이 그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연기도 흘러갔고요. 완성된 영화도 과하게 강요하거나 자랑하지 않아서 참 예쁘고 먹먹했죠”

 
일부 대작 영화가 상영관을 독식하는 스크린 독과점 문제에 대해선 아쉬워했다. “어느 영화라고 소홀할 수 있겠습니까. 다들 열정, 시간, 노력 공히 똑같이 들인 작품이니 공평해야죠. 다양한 영화를 기대하는 관객들도 계시니까, 기회가 좀 더 균등했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중앙일보] 원문링크